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다윈 (문단 편집) ====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 ==== [[에든버러 대학교]]를 자퇴한 후 다윈은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크라이스트|크라이스트 컬리지]]에 입학하여 1831년에 졸업했다. 하지만 다윈 본인은 에든버러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배워야 하는 과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교회]]에서의 사목보다는 박물학에 관심이 많아서, 친척 형인 폭스와 함께 곤충을 잡으러 다니거나 존 스티븐스 헨슬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명물 중 하나인 대학 [[식물원]]의 설립자.]의 식물학 강의를 꼬박꼬박 챙겨들었다.[* 그가 가장 큰 열정을 쏟은 강의라고 한다. 수업만 열심히 들은 게 아니라 그의 조교 노릇을 자처했다.] 다윈의 열정과 지적 능력 그리고 다윈의 가문은 찰스 다윈이 헨슬로의 총애를 받게 하는 데에 충분했기 때문에 이내 찰스는 헨슬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헨슬로는 다윈이 광물학과 지질학을 배우면 훌륭한 박물학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같은 대학의 애덤 세지윅 교수에게 그를 소개시켜주었다. 지질학은 잘 모르는 자신보다는 애덤 세지윅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찰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사촌형 폭스, 교수인 헨슬로와 세지윅에게 곤충학, 식물학, 광물학, 지질학과 같은, 박물학의 여러 지식들을 흡수하게 된다. 이런 인연은, 현대 생물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을 만들어낸다. 찰스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해인 1831년 12월 27일 [[영국 해군]]의 탐험선 [[HMS 비글]] 함을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질학 탐사와 과학 표본 수집을 원하는 [[로버트 피츠로이]](1805~1865) [[함장]][* 이 사람은 당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저명한 과학자들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다윈도 이 중 하나였다. 이 양반은 이후 다른 방면에서 유명한데, 바로 해군 [[중장]]으로 진급한 뒤 '''영국 최초의 기상청장'''으로 취임, 일기예보 시스템을 처음으로 구축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비글 함 항해 이후 항해로 인한 재산 탕진과 기독교인으로서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을 도왔다는 죄책감과 정치적 실패, 기상청을 모함하는 주위에 대한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다, 피츠로이 [[제독]]은 1865년 4월 30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각지에 여러 탐험선들을 파견해서 측량과 과학 연구를 시키고 있었는데, 피츠로이 함장의 비글 함도 그중 하나였다. 비글 함은 과거에 연구 목적으로 출항하였다가 긴 항해 속 외로움으로 전임 함장이 자살하고 말았고, 새로 그 배의 함장이 된 피츠로이는 선배의 전철을 피하고자 젊은 의사나 과학자를 태워 교류하기를 원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헨슬로에게 그런 사람을 찾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헨슬로는 곧바로 찰스 다윈을 추천하여, 22살의 찰스 다윈은 비글 함에 승선할 수 있게 된다. 다윈의 그 자리는 무보수였지만 항해 끝에 수집해온 진귀한 물건을 팔면 돈은 좀 될거라 꼬셨는데, 장거리 항해가 굉장히 위험한 모험이었으므로 제정신인 영국의 의사, 박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던 자리였다. 헌데 다윈은 젊은 나이의 패기 때문인지 이 자리를 멋도 모르고 학구적인 욕심으로 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